본문 바로가기

나의글

시조시인 `이영도`

2010/11/17(수)

월초에 처음 가본 "통영시"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특히 사량도의 멋진 바다와 섬과 산의 풍경을 다시한번 보기위해 월차를 이용하여 사량도 상도를

도보로 일주하고자 한다.(일주도로 총연장길이 17킬로미터).

지난번 통영 방문시 우연찮게 차로 지나갔었던 청마 유치환 시인의 "행복"이란 시에서 나오는

중앙동우체국이있는 청마거리를 걸어보고싶다.

언제가될런지는 모르지만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밤11시 50분에 출발하는 통영행 심야우등고속버스에

몸을 실을 그날을 꿈꾸며

유치환 시인이 통영중앙동우체국에서 거의 5천통에 달하는 연서(?)를 보낸

그 상대방인 시조시인이영도님에 대해

여기저기에서 귀동냥한 내용을 여기에 옮겨본다.

----시조시인 李永道----

이영도 (李永道, 1916.10.22~1976.3.5)

여류시조시인, 호는 정운, 출생지 :경북 청도

1945년 대구의 동인지 竹筍에 시조 除夜 발표로 文才로 인정받음

부산남성여고, 마산 성지여교 교사 역임

著書 : 첫 시조집 1954년 청저집 출간

1968년 오빠 이호우와 공동시조집 “비가오고 바람이 붑니다” 출판

수필집:춘근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 머나먼 思念의 길목

(시감상)

단 란

-이영도-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수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愛情에

삼가는 듯 둘렸다

딸아이는 곁에서 낭랑하게 동화책을 읽고 있고 엄마는 수틀에 자수를 놓고 있는 밤,

호롱불 심지는 환하게 타고 있고 둘은 서로 이마가 부딪힐 듯 마주하며 앉아 있다.

도란도란 母女간의 情感이 새롭다.

시인의 앵글은 딸에 대한 사랑에 포커스를 맞추었고 그 둘을 둘러싼 어둠이란 신의 크신 사랑같은 휘장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어둠이 고운 애정으로 삼가롭게 둘러 있게 된다.

이영도 시인은 이호우 시인의 누이동생으로 우리 현대 시조사에 한 획을 그었다. 언제 만나도 多情多感하고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단아한 모습으로 보였고 늘 잔잔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곤했다.

만민의 연인같고 조선여인의 심볼같던 그 분은 단란한 한편의 모녀도를 남겨놓고 먼나라로 떠나셨다.

김호길의 명시조 감상에서 발췌함

중앙동 우체국

눈에 보이는 빠알간 우체통!

중앙동 우체국은 유치환이 찾아와 사랑하던 여인 이영도(시조시인•당시 미망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또 썼던 곳이라고 한다.1947년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만난 뒤 그는 1967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뜰 때까지 쉬지 않고 이영도에게 편지를 써서 붙였다.20년간 5천통이 넘는 편지를 받은 이영도는 그것을 고스란히 보관해 뒀고 67년 청마 사후 200통의 편지를 추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한집을 냈다.우체통을 가만히 만져본다. 유치환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속에는 정인을 향한 애절한 가슴앓이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이미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의 신분과 남편을 사별하고 홀로 딸을 키우는 미망인의 신분은 그 당시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통영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펜을 놓을 때까지 20여 년간 거의 매일 이영도를 향해 썼던 편지는 그 자체가 시였고,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그 자체의 사랑이었다.

글속 풍경속 사람들 - 정규웅 -

75년 초가을께 한국시인협회가 주최하는 ‘현대시 세미나’를 취재한 일이 있었다.

2박 3일의 일정으로 전주 가톨릭센터에서 열렸다. 세미나에 참여한 100명 가까운 시인 가운데서 유독 한 시인이 눈길을 끌었다.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였다.

60년대 후반, 20년간 유치환에게 받은 5,000여 통의 연서 가운데 일부가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의 책으로 공개돼 화제의 주인공이 됐던 탓도 있었지만 밝은 한복 차림의 이영도는 환갑을 한 해 앞둔 여인답지 않게 곱고 해맑았다.

첫날 오후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또 다른 스케줄을 위해 참석자들은 1층 로비에 모였고, 뒤늦게 몇몇 시인이 2층 숙소에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한복 차림의 한 여성이 계단 중간쯤에서 발을 헛디디며 ‘쿵’소리와 함께 1층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이영도였다. 로비에서 서성이던 몇몇 시인이 그 앞으로 달려갔다. 전주 토박이 시조시인 최승범이 부상이 심한 듯 괴로워하는 이영도를 들쳐 업고 근처 병원으로 내달렸다.

그 사고가 원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영도는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원에 자주 드나든다는 소문이더니 사고 이후 꼭 6개월 만인 76년 3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아침나절 갑자기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저녁 무렵 숨을 거뒀다는 것이다. 1916년생으로 환갑을 7개월쯤 남겨둔 시점이었고, 46년 대구의 <죽순>동인으로 시조를 쓰기 시작한 지 꼭 30년이었다.

이영도는 몇 해 전 생애에 가장 소중했던 두 사람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20년 동안 이영도의 가슴속에 사랑의 불꽃을 심어주었던 유치환, 그리고 이영도를 시조의 세계로 이끌어 68년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를 펴내기도 했던 오빠 이호우였다. 유치환은 67년 2월 13일 부산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숨을 거뒀고, 이호우는 70년 1월 6일 뇌출혈로 쓰러지더니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기이하게도 이들 세 사람은 똑같이 환갑을 앞둔 만 59세를 몇 달씩 전후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영도의 외동딸도 어머니의 20주기를 지낸 뒤 똑같은 나이에 사망했다).

경상북도 청도에서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성장해 스무 살에 출가한 이영도는 딸을 낳은 뒤 얼마 후 남편과 사별하면서 평탄치 않은 삶을 시작했다. 겨우 스물한 살 때였다. 한동안 시댁과 친정의 신세를 지기는 했지만 두 식구의 생계는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므로 이영도는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의 가사교사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유치환은 두어 달 전 같은 학교의 국어교사로 부임해 있었다.

서른일곱 한창 나이 때인 유치환의 가슴속에 스물아홉의 청상과부 이영도는 하늘에서 막 내려온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으로 아로새겨졌다. 유치환은 그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낸 편지의 구구절절이 한결같이 ‘사랑의 시’였다. 하지만 유치환은 처자식을 거느린 한 가정의 가장이었기에 설혹 이영도의 마음이 흔들렸다 해도 그들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결실을 맺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유치환은 3,4년 뒤 통영여중을 그만두고 대구로, 부산으로 학교를 옮겨 다니지만 편지 공세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영도는 50년대 후반 통영여중 교사직을 내놓고 부산으로 이사했고, 유치환은 3,4년 뒤 부산 경남여고 교장으로 자리를 옮겨 두 사람은 똑같이 부산에서 생활하게 되지만 이들이 해후했는지 어쨌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유치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이영도 역시 서둘러 부산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거처를 옮긴 사실로 미루어 그의 죽음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유치환의 편지 일부가 공개됐을 때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삭막한 세상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플라토닉 러브’라 칭송해 마지않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결국은 ‘불륜’이 아니냐고 맞섰다. 하지만 생전의 이영도가 ‘그 일’에 대해서는 늘 희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 했던 것처럼 누가 어떻게 생각했든 그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정규웅, 중앙일보 문화부장 역임) <글속 풍경 풍경속 사람들, 이가서>





















'나의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해안을 다녀오다  (0) 2011.08.08
비개인날 하늘엔 구름이~  (0) 2011.07.18
기찻길  (0) 2010.08.15
폭우가 그친 공원  (0) 2010.08.10
옛 5일장터  (0) 2010.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