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도보여행을 시작하며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21년이란 결코 짧지않은 긴 세월이 흘렀다.82년 1월 육군 사병으로 입대하여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소재 육군 제25사단 전차대대에서 31개월의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1984년 7월에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후 곧바로 직장에 복직하여 근무한 이래 같은 직장에서 지금까지 재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학교를 졸업하고 쉴틈이 없이 곧바로 직장생활을 하였고 결혼과 아이들 출산, 그리고 내집 마련...... 등등의 우리나라 성인들이면 누구나 겪는 일상사를 영위하여 왔다. 그동안 두 아이(연재:중학교3년, 연준:초등5년)를 열심히 키우는 데 많은 즐거움을 느꼈으며 두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 그리고 아내(전옥주, 40세)에게 좋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잘 하려고 열심히 살아온 가장이라고 자부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도 많았던 지난 세월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뜻하지 않은 病患으로 근 2년간의 鬪病生活속에 운명을 달리하신 아버님(정금영, 2001년 1월 別世, 당시 71세)을 생각하면 자식으로서 너무나 안타까움과 함께 이제는 보고 싶다는 그리움이 나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 온다.
아울러 홀고 계시는 늙으신 어머님, 장모님 두분 모두 건강히 오랫동안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제 내 나이 44세! 바로 어제 고등학교 동창 녀석(재일,응호,정식,주원......)들과 함께 어울려 농구하고 학교 근처 빵집에서 서로의 미래를 꿈꾸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놀았던 것 같은데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어 이제는 머리가 약간은 희고 주름살도 만들어 지고 뱃살도 불어난 몸이 되었고, 이제 만나면 우리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이야기, 자기 아이들 학교 이야기, 財테크 이야기 등등으로 이야기의 주제도 너무나 많이 바뀌어 버렸다. 한 마디로 흐르는 세월속에 너무나 나약한 우리들이 되어 버렸고 그 꿈 많았던 청소년시대의 야망등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안타까운 심정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이 세월이 흘르면 그리워지겟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과연 내 자신의 지금 나이에 영원한 추억을 만들고 또한 중년의 나이를 기념하면서 지금까지의 내 자신을 뒤돌아 보고 앞으로의 내 삶의 활력소를 불어 넣어주기 위하여 어떤 이벤트를 모색하던중 어릴 때부터 꿈꾸어 왔던 『도보여행』을 생각하게 되었다.
도보여행을 통하여 우선 걸을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주신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나를 이해하여 주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서 지금부터 본격적인 도보여행을 시작하여 한다.
우선 도보여행을 막상 시작하려 하니 너무나 막막한 것이 사실이다.
먼저 다음과 같은 의문점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첫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도보여행을 할 것인지
둘째, 도보여행 시간을 어떻게 낼것인지
셋째, 사전 준비물은 무엇인지
넷째, 도보여행을 하는데 과연 나의 체력은 어느 정도인지
다섯째, 도보여행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런지 등등......
이러한 도보여행을 실시하기 전에 궁금한 것과 걱정거리 등을 곰곰히 생각한 끝에 다음과 같은 나름대로의 어설픈 여행계획을 짜고 이내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아울러 도보여행은 치밀한 계획 보다는 투박한 실천이 더욱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면서.
여행 계획을 개략적으로 언급하면,
▣ 제1차 도보여행 계획
? 여행 구간
?서울(도봉동)
⇒ 고향 (경북 상주시 낙동면 장곡리)
?이유
나의 고향이자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셨으며 가장 존경하였고 지금은 무한한 그리움의 대상인 아버님이 영원히 편하게 잠들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나 힘들더라도 아버님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걸어 볼려고, 고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리운 마음을 간직하고 힘들고 무거운 걸음을 가볍게 하려고
? 여행 기간
1) 2003년 5월 31 ~ 2003년 12월 말 까지
2) 휴일을 이용하여 구간별로 이어 걷기
? 사전 준비물
여행지도, 베낭, 우의, 간편복, 등등
? 특이사항
금번 제1차 도보여행을 하면서 힘들겠지만 틈틈이 기록을 유지하여 먼 훗날 나의 아이들이 아빠가 걸었던 길을 건강한 신체로 다시 걸으면서 아빠의 체취와 생각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투박한 글솜씨로 글 스케치를 하려고 계획한다.
아울러 사실 도보여행을 사랑하는 큰아이 연재와 함께 하려고 하였는데 연재가 중학교 3학년인 관계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친구나 직장동료와 하려고 하니 함께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서 우선 제1차 여행은 혼자 하기로 계획하였다.
밝혀 두는데, 연재, 연준이가 대학에 가거나 사회생활을 할 때 시간이 함께 만들어 꼭 한번은 도보여행을 할 것이다.
자!
이제부터 실천이다.
몸은 가볍게, 마음속에는 굳은 의지를 갖고 도보여행을 시작하자.
중간 중간에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어려움을 이겨내고 완주하여 아버님 앞에서 아버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자. 그리고 그토록 걷고 싶었던 우리나라 山河를 나의 두다리로 그리고 두눈으로 직접 내딛고 보고 마음껏 느껴 보자!
♣ 제1구간 (구의동 ⇒ 도봉동)
?일 시 : 2003년 5월 31(토)
?구간거리 : 약 18㎞
?소요시간 : 약 4시간 (17시~21시)
?날 씨 : 한 여름의 뜨거운 날씨(한낮기온 30도)였지만 오후에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 시원하였음.
오늘은 토요근무일이라 오후 5시에 퇴근하여 간편한 복장으로 너무나 뜻깊고 가슴 설레이는 제1차 도보여행의 대장정을 힘차게 시작하였다.
도보여행이란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단순하고 한편으로는 원시적인 여행이고 또한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천하기 어려운 여행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직장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전체 목표 구간을 시간이 나는대로 조금씩 조금씩 이어서 걷는 방법으로 하려고 한다. 이 방법은 전체 구간 완주에 많은 기간이 소요되지만 우선 직장생활에 지장이 없어 좋고 또한 체력적으로도 큰 무리를 없을 것같아 이 방법으로 하기로 하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구의동 사무실을 오후 5시에 출발하여 어린이 대공원을 돌아 30분 쯤 걸어 군자교에 이르러 군자교 위에서 중랑천 둔치로 내려가는 다리를 이용하여 쉽게 중랑천 자전거 도로로 내겨갈 수 있었다. 중랑천 둔치 양쪽으로 자전거 도로와 운동시설 그리고 휴식공간을 잘 만들어 놓은 관계로 이곳부터 우리집 도봉동 삼환아파트까지는 자동차 소음과 매연을 덜 마시고 상쾌한 기분으로 걸을 수 있어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명박 서울특별시장이 작년에 취임한 이래 강남북의 균형 발전을 위하여 상대적으로 도시기반 시설이 뒤떨어져 있는 강북의 도시발전에 많은 노력을 할 것이라고 언론에 밝힌 적이 있다.
사실도봉구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뒤 늦은 감이 있지만 李 市長의 강북발전 언급에 매우 공감을 하면서 하루빨리 가시적인 사업성과를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강남북 불균형의 한 例로써 지하철 7호선을 살펴보면
지하철 7호선은 장암역에서 강남을 거쳐 온수동까지의 긴 노선으로 강불에 20개, 강남에 22개하여 총 42개의 지하철 驛捨가 있는데 강남북의 지하철 역사 시설을 비교하여 보면 강북의 한 시민으로서 너무나 열을 받는다.
강남의 일부 아니 대부분의 지하철 역은 바닥엔 대리석으로 그리고 지상까지 올라오는데 에스컬레이터 시설 등 그야말로 호화 시설로 건설되어 있는 반면에 강북의 대표적인 건대입구역은 지하출입구가 한군데 밖에 없어 이용하는 시민들의 많은 불편을 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와서 시민들의 불편함을 덜고자 지하철 출입구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나 그 사업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아직 착공 조차 못하고 있고 최근에야 하나 있는 출입구에 지상으로의 에스컬레이터 시설을 완공하였다.
또한 내가 매일 이용하는 수락산 지하철역의 경우도 주말이면 많은 서울시민들이 수락산 또는 도봉산으로 등산을 가고자 구름같이 모여드는 지하철역임에도 시민 편의 시설은 전무한 형편이다. 최근에야 출입구에 지상으로의 에스컬레이터 시설을 만들다고 몇 달전부터 공사를 하면서 오히려 이용 주민들에게 불편함을 더욱 끼치고 있는 실정이다.
정말이지 서울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화가 난다. 같은 세금내고 똑같은 서울시에 살면서 이렇게 푸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열을 받으면서 이명박 시장에게 거는 기대감이 더욱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왜 지하철역의 강남북 불균형을 언급하느냐 하면서 강북의 발전을 위하여 중랑천변 개발(시민 체육시설 및 위락시설 건설)에 대한 나의 생각을 잠시 언급하고자 함이다.
현재 중랑천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동쪽으로는 광진구, 중랑구, 노원구 3개구가 서쪽으로는 도봉구, 성북구, 동대문구, 성동구 4개구 등 서울시 총 7개 자치구가 인접해 있다. 이들 인접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서울시 25개 자치구중에서 재정자립도나 재정형편면에서 매우 취약한 자치구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랑천변 개발은 자치구 자체예산(물론, 서울시 지원금도 일부 있음)으로 개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인접구간 재정형편에 따라 시설의 질이 좋고 나쁨이 드러나고 시설물의 연속성이 없어 이용시민들의 불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예를들어 노원구 맨북쪽 시발점에서 마라톤을 시작하면 노면에 거리별로 1㎞, 2㎞........ 9㎞ 가 표시되어 있어 본인이 얼마나 뛰었는지 쉽게 알수 있는데 노원구 구간이 끝나면 바로 중랑구 구간 표시로 다시 1㎞, 2㎞......로 표시되어 있고 노면 또한 다른 재질로 바뀌어 이용 시민들에게 당혹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용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랑천변 모두는 서울시 구역이라고 생각하지 어디서 어디까지는 00구, 또 어디서 어디까지는 00구 이렇게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나의 생각은 중랑천변 개발?관리를 서울특별시에서 관장하여 일률적으로 계획을 세워 집중 개발?관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이곳 중랑천 변의 주민들에게 보다 친근하고 쉽게 접근하여 많은 시민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휴식공간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또 한가지는 중랑천 변 양쪽을 돌아오는 코스로 하여 정규길이의 마라톤 구간을 조성하여 준다면 더욱 좋을 것 같은 나의 생각이다. 이런 나의 생각은 일전에 某 서울시의원에게 건의를 드렸던 사항인데 시행이 될 런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큰 기대를 하여 본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중랑천변을 걸어가니 주위에는 유채꽃이 피어있고 그 옆 농구장에서는 젊은 학생들이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경기에 임하고 있는 건강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우리 광진구와 경계 지점인 장평교 밑에서는 일단의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고 있어 호기심으로 잠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큰 환호소리와 함께 약 40Cm 정도의 큰 가물치가 낚시대에 걸려 오는 것이었다. 힘차게 요동치는 가물치를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 보다는 죽어가는 우리의 중랑천이 이제는 생명이 살아 숨쉬는 건강한 하천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에 더욱 기쁨이 컸던 것은 아마 도시민의 지나친 욕심은 아닌지 모르겠다.
중랑천변의 일부분을 관리하는 우리 광진구에서는 중랑천변에 보리를 파종하여 초여름에 수확함으로써 도시민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고 있다. 또한 수확시에는 관내 유치원, 초등학교 학생들이 참가하여 잊혀져 가는 우리 농촌의 아름다운 옛 생활풍습을 체험하게 하고 있다. 또한 수확한 보리쌀을 관내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함께 더불어 잘 사는 복지 광진의 꿈을 실천하고 있다.
중랑구의 월릉교를 지나고 노원구 지역으로 진입하였을 때 이윽고 시간은 저녁 7시가 넘어 가고 비록 한 낮의 뜨거운 태양열기는 없어 졌지만 그래도 매우 더운 날씨속에 많은 양의 땀이 흘러 내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너무나 갑자기 그것도 심한 허기와 갈증에 더 이상 걸어가기가 힘들었다.
역시 아무런 준비없이 더운 날 무리하게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물론 길옆에 노점상이 있어 쉽게 음료수를 구입하여 먹을 수 도 있었지만 전화를 하여 큰아이 연재(중학교3년)에게 부탁을 하여 음료수를 갖고 자전거를 타고 나오라고 하였다.
전화를 하고 길옆에서 쉬고 있는데 연재는 씩씩하게 자전거를 타고 금방 왔다. 연재가 가져온 조금만 봉지에는 빵 2개와 음료수가 있었다. 역시 착한 놈이다. 그 무엇보다도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이제부터 힘을 내어 연재와 함께 걸어갔다.
어둠은 조금씩 찾아왔지만 서울의 밤거리는 어둠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둠과 동시에 찾아오는 가로등 불빛이 오늘은 반갑지만 않았다. 연재와 함께 걷는 초여름의 밤에 우리는 연재의 미래, 그리고 우리 가족의 아름다운 내일을 이야기 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반가운 얼굴들이 모여서 재미있게 싸우면서 살아가는 마이 홈에 도착하였다.
♣ 제2구간 (잠실역 ⇒ 경기도 廣州)
?일 시 : 2003년 6월 6(金)
?구간거리 : 약 34㎞
?소요시간 : 약 5시간 (09시 20분~14시 40분)
?날 씨 : 오전에는 초여름의 뜨거운 날씨(한낮기온 30도)
오후 많은 구름속에 가끔 빗방울 끝에 장대비
오늘은 현충일 그리고 내일은 토요휴무 모레는 일요일이라 금번 도보여행의 대장정을 실질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오전 9시에 집을 나와 지하철 잠실역에 도착하였다. 몇일전 종로1가 중앙지도사에서 구입한 지도를 참고하여 계획한 오늘의 구간코스는 잠실역을 출발하여 복정역⇒약진로 ⇒남한산성입구⇒남한산성정상⇒경기도 광주 시내 입성에 이르는 약 34㎞이다.
베낭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약 5㎏에 이르렀고 신발은 10년 전부터 신고있는 레드페이스 등산화와 등산긴바지, 등산 티셔츠에 안전을 생각하여 노란 모자를 쓰고 힘찬 발걸음을 내 디뎠다. 그 얼마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으며 직접 실천하기 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던가!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전진뿐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걸으면서 비록 다리는 피곤하여도 마음은 너무나 가볍고 기분이 좋았다. 다만, 출발전부터 함께 가자고 조르던 연재와 휴일에 함께 못 놀아준 가족들 생각에 마음 한편으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다.
나의 힘찬 발걸음은 출발한지 1시간 후인 10시 25분에 서울특별시와 성남시의 경계인 지하철 복정역에 다다랐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심한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 11시 17분에 드디어 남한산성 입구 308번 도로의 시작점에 도착하였다. 이제 부터는 남한산성 정상부근까지 계속 굴곡이 심하고 좁은 언덕길을 가야한다. 멀리 보이는 언덕길을 쳐다보니 지레 겁이 나는데 문제는 언덕길에서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을 평지보다 배이상으로 많이 마신다는 것이다. 또한 308번 국도는 남한산성을 관통하기에 굴곡이 매우 심하고 보행인이 걸을 수 있는 보도가 전혀 없어 매우 위험하였다. 또한 심한 더위로 인한 땀방울과 지독한 자동차 매연이 뒤엉킨 최악의 상황에서 도보여행의 첫날 일정을 힘차게 수행하고 있다.
고생 끝에 남한산성 정상 부근에 오르니 『산성터널』이 나타났는데터널속에는 보도가 있어 편하게 167m의 터널을 벗어나자 마자 『경기도 광주시』라는 푯말이 나타났다.
오늘 목표가 경기도 광주시까지 였는데 광주시 안내판을 보니 언덕길을 오르면서 그렇게 힘들었던 다리에 힘이 불끈 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 남한산성 정상이다!
남한산성 도립공원은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하지만 이런 슬픈 역사를 바로 알아야 더욱 튼튼한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남한산성 국립공원은 1973년 4월에 그당시 조병규 경기도지사가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12월에 도립공원을 완공하였다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공원을 내려가려는 부근의 전시유물관에서 안내 표지판을 보니 광주시 15㎞라는 이정표가 있었다.
힘차게 내리막길을 내려가려는 길에 바로 내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던 중학생이 너무 빨리 달리다가 넘어져 얼굴등을 많이 다쳤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고에 당황을 하였지만 나는 그 학생의 이버지와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긴급 구호조치를 하여 승용차에 태워 병원으로 떠나는데 도움을 주웠다. 아무쪼록 녀석이 많이 다친곳 없이 빨리 회복하기를 기원한다.
갑자기 연재와 연준이 생각이 났다.
그 녀석들도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안전사고에 유의할 것을 재차 교육을 시켜야 할 것 같다.
날씨는 어느새 변하여 짙고 어두운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간간이 빗방울을 뿌리고 있다. 공원 계곡에서 놀던 행락객들이 비를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더 많은 비와 올까 걱정이다. 아침에 날씨가 너무 좋았고 일기예보에도 비온다는 말이 없어 우산이나 우비를 준비하지 않았기에 걱정을 하면서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왔다.
드디어 오후 2시 16분에 308번 국도가 끝나고 43번 국도에 접어드는 남한산성 매표소 삼거리에 도착하였는 데 여기서 본 이정표에는 광주시 8㎞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선 이곳에서 점심으로 막국수를 간단히 먹었다.
잠시의 휴식 끝에 계속 걷는데 빗줄기가 더욱 세차게 굵어 지고 있다. 빗길을 걸으니 지나가는 차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고 얼굴에는 땀방울과 빗방울이 함께 흘러내려 걷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마침 중부고속도로 교각밑에서 잠시 비를 피해 약20분간 서있는데 비는 그칠 기색이 없이 더욱 세차게 내려 더 이상 걷는다는 것이 사실상 무리인 것 같은 판단이 서고 옷도 젖어서 처량한 생각조차 들고 또한 비를 피할 만한 장비도 없고 쉴 마땅한 장소도 없었다. 그리하여 첫날의 대장정은 여기서 마치기로 마음의 결정을 하고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장소는 광주시 방면으로 5㎞의 이정표가 서있는 『앵두나무골』의 군부대 입구였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대로 지나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천호동으로 와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 얄밉게도 날씨는 활짝 개이고 있었다. 오늘 무더위 속에서도 거의 30㎞를 걸었지만 별로 다리는 아프지 않았다. 옛 속담같이『시작이 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족들과 즐거운 휴일의 오후 시간을 보냈다.
♣ 제3구간 (광주시 앵두나무골 ⇒ 경기도 利川)
?일 시 : 2003년 6월 7(土)
?구간거리 : 약 35㎞
?소요시간 : 약 7시간 30분(12시 ~19시 30분)
?날 씨 : 한여름의 폭염(한낮기온 31도) 햇볕은 쨍쨍
아침에 연준이를 학교에 차로 등교시켜 주고 가벼운 준비를 한 후 오전 10시에 집을 나와 지하철로 명일역까지 온 후 광주행 시외버스 13번을 갈아타고 어제 중단지점인 광주시 『앵두나무골』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50분 이었다.
오늘과 내일 이틀동안 도보를 하여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까지 가는 57㎞의 거리를 주파하는 목표를 잡고 오늘은 경기도 이천시까지의 35㎞를 돌파하리라 다짐하면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였다.
광주시 5㎞라는 표지판을 보면서 출발하였는데 잘 정비된 3번 국도에 자동차는 시원하게 시속 80~100㎞로 달리는 데 비하여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보도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 걸음을 걷는 사람들이 조심하면서 걸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막연히 도보여행이 멋있고 낭만적으로만 생각한 나의 마음이 산산이 깨지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를 마주보며 좁은 갓길로 걸으니 교통사고 위험에 겁도 나고 가끔 바짝 붙어 달려드는 화물차, 버스등이 내 옆을 지나칠 때에는 등골이 오싹 오싹 하였다.
먼산과 들판을 쳐다보며 한가롭게 걷는 낭만적인 도보여행을 상상하였는데 현실은 그야말로 딴 판이었다. 너무 더웠다. 얼굴과 팔뚝에 썬크림을 듬뿍 바르고 모자를 쓰고 열심히 걷는데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땀으로 이내 지워지고 지나가는 자동차에서 내 뿜는 매연과 열기로 인해 체감온도는 더욱 올라가니 그야말로 악전고투속에 한걸음, 한걸음 내 딛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나 처음으로 내 발걸음으로 밟아 보는 땅이라고 생각하니 힘이 불끈 솟아 오르는데 쉬지않고 시속 6㎞정도의 속도로 걷다보니 눈앞에 제일먼저 보이는 아파트와 함께 광주시 전경이 반갑게 모습을 드러낸다.
『꿈과 희망이 넘치는 孝의 고장 - 광주』라는 둥그런 아치를 마치 개선문으로 생각하면서 지나니 드디어 광주 시내에 도착 하였다.
하지만 광주시내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나의 실수로 외곽도로로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약 1.5㎞ 정도를 우회하여 걷게 되었다. 분명 길거리 표지판에는 이천 방향으로 되어 있어 우회전을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거리방향이 지도와 맞이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길거리 표지판을 보고 계속 걸은 나의 잘못으로 더운 날씨속에 적지않은 에너지를 허비한 결과를 초래했다.
지도를 자세히 보고 가게주인 및 하교중인 학생들에게 물어본 결과 잘못 들어온 길임을 알아차리고 가는 방향을 수정하여 걷게 되었다. 이윽고 광주시내에 들어와 알게 되었지만 광주시내를 우회하는 외곽도로로 내가 방향을 잡은 결과인데 모든 표지판이 자동차 운행 위주로 되 있다는 사실을 미쳐 내가 몰랐던 것이다.
자동차는 우회해도 몇십㎞가 문제가 되지 많지만 도보로 걷는 나로서는 몇시간을 허비하는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에 지도상 계획한 길을 잘 찾아 걷는다는 것이 도보여행에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값진땀방울을 흘리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광주시내는 그야말로 복잡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없는 국도로 혼자만 걷다가 시내에 들어오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가웠다.
광주시내를 벗어나 좌회전하여 이천 방향의 3번 국도로 접어드니 매우 긴 고갯길이 나왔다. 이곳의 지명은 雙嶺洞인데 大雙嶺里 까지의 약 2㎞구간이 모두 언덕이었다.
더운 날씨속에 고갯길을 걸어가자니 많은 땀이 나고 숨이 차던중 고갯길 중간지점에 마침 『서산 산낙지』라는 음식점 옆에 파라솔과 의자와 놓여 있어 매우 반가운 마음에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1시 47분을 가리키고 햇볕을 피할 수 있는 파라솔 밑에서의 휴식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달콤한 시간이었다. 집에서 가져온 캔맥주를 너무나 시원하고 맛있게 먹고 오후 2시에 출발을 하였다.
계속되는 자동차의 질주, 흘러 내리는 땀, 마땅히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신경을 써가며 도로위를 걷는 내 모습의 그림자,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걸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가끔 걸려오는 연재의 핸드폰 목소리에 큰 힘을 받고 걷고 또 걸어서 드디어 오후 3시 30분 『곤지암』에 도착하였다.
곤지암은 前 부서에서 함께 있던 이영찬 계장님의 고향으로 계원들과 함께 놀러와서 회식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헤어져서 근무를 하고 있는 그리운 예산계 동료들 .. 조철호과장님. 이영찬계장님, 신현식주임님, 김인숙씨... 그리운 얼굴들을 떠 올리면서 걷노라니 힘이 난다.
더운 날씨속에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몸은 지쳐 가는데 적당히 밥먹을 식당은 없고, 어서빨리 식당에 가서 배불리 먹고 쉬고 싶은 생각뿐인데 지금 걷고 있는 『세계 도자기 엑스포 기념 광주조선관요 박물관』앞에는 오직 자동차만이 열심히 달리고 주변 정리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오히려 황량한 느낌 조차 들 정도였다.
그디어 20여분후 오후 3시 50분에 곤지암시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곤지암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소머리국밥을 먹고자 『동서소머리국밥』집으로 들어갔다. 모든 음식점이 원조라는 간판을 내걸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데 나는 원조라는 단어가 없는 국밥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먼저 혼자지만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국밥과 막걸리를 주문하니 막걸리는 없다는 대답이다. 아쉽다. 너무 아쉽다. 목마른 나그네가 탁주 한잔 입에 걸치고 시장기와 갈증을 동시에 없애는 시원함을 맛보려 했는데.... 그렇다고 소주나 맥주를 먹을 형편도 안되고 그냥 국밥만 국물하나 안 남기고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역시 소머리 국밥은 곤지암이 최고야!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내 걸음을 또 재촉한다. 곤지암을 조금 지나가니 중부CC 표지판이 보인다. 나도 돈이 많다면 이 시간에 이렇게 많은 땀을 흘리면서 걷지않고 시원한 나무 그늘 또는 양산을 쓰고 파아란 그린위로 흰 골프공을 하늘 높이 날리면 주위에서 들려올 “나이스 샷” 소리에 오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현실은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아주 원시적이자 무식한 방법으로 걷고 있는 내 자신을 따라오는 그림자를 벗삼아 땀을 흘리고 있다.
약 6㎞를 지나가니 『넋고개』정상에 다다렀다. 시간은 오후 5시 30분, 이 고갯길은 광주시 실촌면과 이천시 신둔면에 걸쳐 있었는데 고갯길 이름이 넋고개라 분명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하였다.
추후에 『넋고개』의 전설을 알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천시 관고동과 사음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기치미 고개와 이천시 신둔면과 광주시 실촌면의 경계를 이루는 넋고개, 이 두 고개는 신립장군에 관한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물밀듯이 북상하여 오자 조정에서는 도순변사 신립 장군과 종사관 김여물을 보내 왜군을 막게 했다. 4월 26일 충주에 다다른 신립은 처음에는 문경새재에서 적을 막으려 했으나 길이 너무 험하여 달래강을 뒤에 두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겨우 수천명의 군사들로서는 조총을 앞세운 왜군에 당할 길이 없어 참패하고 신립과 김여물은 적병 수십 명을 죽이고는 탄금대 위에서 몸을 던져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부하들이 시체를 건져 서울로 오는 도중 ?장군님? 하고 부르면 관속에서 ?오냐? 하는 대답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천시를 지나 기치미 고개에 이르러 또 ?장군님? 하고 부르니까 대답 대신 ?에헴? 하는 기침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넋고개에 이르러 또다시 ?장군님? 하고 부르니까 그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신립 장군의 넋이 기침을 한 고개라 하여 기치미고개, 장군의 넋이 아주 떠난 고개라 하여 넋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립 장군의 묘는 지금 광주시 실촌면에 있는데 거기까지 온 관이 땅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아 그 자리에 묘를 썼다고 한다.
고개 정상에는 “동원대학”이 굉장한 규모의 건물 위용을 자랑하면서 우뚝 서있다.
이내 출발하여 정상의 아래로 접어들려는 순간 너무나 반가운 이정표가 나를 반긴다. 『이천 8㎞, 충주80㎞』아!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구간이다. 정상 부근의 하이웨이 주유소에서 시원한 냉수 한그릇을 얻어 먹고 이천시내를 향하여 열심히 걸은 끝에 드디어 오후 7시 30분 이천 시내에 도착하였다.
도자기 엑스포 주전시관을 설봉공원을 지나니 이천의료원이 나타나고 곧이어 설봉 온천에 도착하였다.
利川! 쌀맛이 좋은 고장, 그리고 도자기의 고장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先親과 너무나 자주 왔었던 고장이다. 이천에는 가까운 친척 “상근이 형”이 살고 있다. 아버지와 우리는 가끔 시골에 다녀올 때 자주들렀으며 아버지께서 많이 아프실 때에도 시골에서 오는 길에 꼭 들르자고 했는데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상근이 형네 집에 안들어 간 것이 마음이 걸린다. 아버님, 미안합니다.
이천시내의 표지판에는 충주 72㎞, 장호원 29㎞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이천 시장근처에 가서 해장국과 막걸리 1병으로 저녁을 먹는데 마음씨 좋은 주인 아주머니는 계속 반찬을 더 주면서 이천 자랑을 한다. 이제 곧 여관에 가서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픈 다리가 더 아프고 먹은 막걸리에 취기도 조금 오른다. 그 순간 연재에게 핸드폰이 왔다. 아빠, 오늘 안오느냐고? 오늘 집에 안들어 간다고 하니 매우 실망하는 눈치다. 그리고 늦어도 집에 오라는 연재의 목소리가 너무나 다정하다. 너무나 이쁜 녀석, 부디 건강하고 씩씩한 청년으로 자라나길 아빠로서 기대한다.
너무나 힘들었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3만원 달라는 아주머니를 설득하여 2만5천에 식당옆에 있는 이천 시내의 “부귀여관”에 들어 갔다.
혼자 들어온 여관방!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피곤한 몸을 풀었다.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내일은 장호원까지의 약 30㎞ 구간을 더 가야한다. 그리운 가족들을 빨리 만나기위해 속도를 내어 장호원까지 가야지.
중곡동 어머님은 괜찮은지 걱정도 되고...... 장남으로서 아들로서 잘 모셔야 되는데 이상하게 일이 꼬이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부디 건강히 오랫동안 편안하게 장수하시기를 바란다.
여관방 TV에서 나의 청소년 시절에 우상이었던, 지금은 늙은 가수들이 출연한 가요프로가 나오고 있다. 최헌, 장미화, 옥희, 이수미 등등 흘러간 70년대의 그리운 노래, 노래는 그대로인데 부르는 가수들은 너무나 늙었다. 안타까웠다. 하기야 그 노래를 듣고 좋아하던 나도 이제는 40대 중반이 되었으니! 세월을 되돌릴 수는 정녕 없단 말인가!
잠이 막 들려는데 핸드폰이 왔다. 아내는 혼자 자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고 연재는 내일 빨리 오라고 한다. 그래 내일 빨리 갈께!
♣ 제4구간 (경기도 利川 ⇒ 이천시 장호원)
?일 시 : 2003년 6월 8(日)
?구간거리 : 약 30㎞
?소요시간 : 약 6시간 (08시 ~14시 00분)
?날 씨 : 오전 안개속 한여름의 폭염(한낮기온 30도)
햇볕은 쨍쨍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설봉온천옆 설렁탕 집에서 아침을 먹은 후 오전 8시에 장호원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이천 시내에서 장호원까지 표지판에는 29㎞를 가리키고 있었다. 참고로 어제 걸으면서 시간을 측정하여 보니 1㎞를 걷는데 약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조금 빠른 걸음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어제 속도로 걷는다면 장호원까지 약 5시간 정도가 소요되어 오후 1시면 도착할 것 같다.
어제 약간 무리하다 싶이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길거리 상황은 어제와 같이 보도가 없어 걷기에 매우 불편하고 안전사고가 염려되는 수준이다. 다만, 아침일찍 걸으니 지나가는 자동차가 조금 적은 것같아 다행인데 반면에 모든 차가 너무 과속으로 달리는 것에 많은 신경이 쓰인다.
이천 시내를 지나 오전 9시에 이천시 부발면 Hynix전자 정문앞에 도착하였다. 옛날 이름, 현대전자! 지금의 경제신문에 회생문제를 놓고 1면 톱 기사를 장식하고 있는 회사이다. 경제에 대하여 문외한이기에 여기서 언급할 처지는 아니지만 국내 경제를 위하여 조속히 현안문제가 매듭 지어지고 정상화를 찾기 바라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현대전자를 지나니 이천 특유의 드넓은 들판이 나를 반겨준다. 넓은 들판과 질주하는 자동차 사이의 단조로운 풍광과 어울려 계속 전진, 또 전진하자니 벗겨지는 안개속으로 뜨거운 태양열이 나의 피부를 따갑게 자극한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은 대체로 꼬불꼬불하고 언덕길이라 내가 가야할 길의 가시거리가 얼마 되지않은 관계로 지루한 감은 없었는데 이길은 우리나라 전형적인 들판을 가로질러 만든 길로 가시거리가 멀기에 심리적으로 피로도가 더 심한 것 같다.
“쌔에엥” 하고 방금 나의 옆을 지나간 자동차가 내 시야에서 벗어나는 길까지 걸어가려면 최소한 3~40분은 가야하니, 단순하고 무덥고 지친 나의 발걸음은 더욱 힘이 없어 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일순간 반가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응암휴게소” 시간은 오전 9시 53분이었다. 휴게소 앞 표지판에는 장호원 18㎞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10분간의 휴식을 마치고 또 똑같은 방법으로 걷는다.
한 시간을 걸으니 이천시 가남면이 나왔다. 무더위로 걷는 속도가 한시간에 5㎞ 속도밖에 나지 않는다. 아마 오후 2시쯤 장호원에 도착할 것 같다. 지친 몸을 이끌고 열심히 걷던중 길옆 골프장 표지판이 하나가 보이는 서있는데 인근 골프장에서 합동으로 만들었는지 10개의 골프장 안내판이 한곳에 붙어 있었다. 가히 골프장의 고향 -- 이천시-- 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좁디 좁은 우리나라 땅, 아니 이천 땅에 무슨 놈의 골프장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또 다시 기다란 고갯길을 올라서니 드디어 “이천시 장호원읍” 포지판이 너무나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장호원읍내 까지 아직도 8㎞가 남았다.
너무나 힘들었지만 나는 씩씩하게 걸고 있다. 조금 걸으니 “상승대 육군교도소” 안내판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육군교도소가 남한산성에 있는지 알았는데 이곳에 있다니 새삼스러웠다. 아마 얼마전에 이전을 하였는가 보다.
길거리에 있는 “선읍휴게소”에서 캔맥주를 한잔 마시면서 바라본 표지판에는 “서울 93㎞, 이천 23㎞”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까지 93㎞를 걸어온 것일까? 뿌듯한 성취감에 지친 나의 다리근육에 힘이 솟는다.
휴게소 TV에는 전국 노래자랑이 막끝나고 시상을 하고 있다. 평상시 일요일 같으면 거실에서 뒹글거리면서 시청하고 있을 시간인데..
연재가 빨리 오라고 전화가 왔다. 그래 연재야, 아빠가 지금부터 한시간 정도 걸어가면 오늘의 목표지점에 도착하여 집으로 되돌아 갈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라!
한창 걷고 있는데 나의 10m 앞에 개인택시가 달리다가 섰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지나가는데 차창을 열고 택시기사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아저씨, 이 더운날씨에 왜 혼자 걸어갑니까? 내가 장호원에서 이천까지 세 번 왕복했는데 계속 걷고 있으니 딱 하십니다. 돈 안받을 테니까 그냥 타십시오.”
나이가 지긋하신 기사 아저씨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니 아저씨는 계속해서 차를 타라고 고집을 부리시는데 나 또한 완강히 거절에 거절을 거듭한 바, 결국 매우 섭섭한 표정을 지으시고 “그러면 고생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출발을 하였다.
“마음씨 좋으신 아저씨, 안전운전하시고 건강히 돈 많이 버세요”
계속하여 힘들게 걸음을 재촉한 끝에 드디어 14시 10분 장호원 시내에 있는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는 기쁨을 맛 봤다.
너무나 반가웠다.
동서울행 14시30분 직행버스 차표를 예약하고 근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곱빼기를 주문하였는데 음식이 나오기 전에 냉수를 네다섯컵 들이켰더니 정작 음식은 반 밖에 먹지를 못하였다.
그만큼 힘들고 무더운 날씨속의 苦行 이었다.
내가 그토록 힘들게 걸었던 길을 거꾸러 달리는 시외버스 차안에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오늘 6시간 걸려 있는 힘을 다해 걸은 구간이 30㎞ 였는데 내가 타고 있는 버스는 겨우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보여행이란 것이 그 얼마나 비경제적이고 소모적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귀경길 이었다.
하지만 계획의 목표를 땀으로 달성하는 뿌듯한 성취감과 함께 힘들고 어렵지만 해볼만한 도보여행의 참맛을 느끼게 하여준 내 인생의 도보여행 첫 도착구간으로 『장호원읍』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